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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공채 영업맨, 한국 카메라 산업의 전설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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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25-02-19 16:13 조회 2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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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충현

前 삼양옵틱스 대표, 前 삼성전자 상무

1982년 삼성에 입사해 삼성전자 이미징 사업 부문 상품 기획·마케팅 담당 상무까지 지냈습니다. 2013년, 경영이 악화된 카메라 렌즈 전문 기업 삼양옵틱스의 CEO로 전격 발탁돼, 4년 만에 600억원대 매출과 코스닥 상장이란 반전을 일궈낸 굴지의 경영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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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카메라 산업의 대부로 통하는 이가 있습니다. 삼성의 말단 카메라 영업 사원으로 시작해 임원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 커리어의 소유자이자, 2009년 ‘한효주 카메라’로 불리는 디지털 카메라를 기획 출시해 불과 3개월 만에 100만대 판매고를 올린 업계 신화로도 유명하죠. 그뿐만 아닙니다. 2013년 수백억원대 적자를 기록하며 경영난에 처한 카메라 렌즈 전문 기업 삼양옵틱스 CEO로 발탁, 4년 만에 600억원대 연매출과 코스닥 상장이란 대반전을 써낸 굴지의 경영인이기도 합니다. 바로 오늘 프롤로그의 주인공 황충현님의 이야기입니다. “인생은 아이러니예요. 불운이 없었다면 운명을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요.” 카메라 업계 전설로 통하는 그이지만 그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신입 시절 쫓기듯 발령 난 영업 현장에선 10년 넘게 바닥을 훑으며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고, 훗날 경영자로선 ‘낙하산 CEO’라며 불신하는 직원들의 강한 반발에도 맞서야 했습니다. 설상가상 두 차례의 화마(火魔)와 암 투병까지… 곳곳이 가시밭길이었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든 불운 덕에 비로소 운명을 만날 수 있었다”는 황충현님. 필생의 동반자 카메라와 함께한 다사다난 40년, 불운을 기회와 운명으로 뒤집어 낸 그 집념의 이야기를 리멤버가 오롯이 담아봤습니다.

Chapter. 1 삼성 상무도 신입 땐 꼴찌?! 황충현님은 홍익대 무역학과를 나와 1982년 삼성에 입사합니다. “평생의 동반자 카메라와의 만남은 좌충우돌로 시작됐네요.” 대학 졸업 후 무난하게 삼성에 바로 취업하셨어요. 절대 무난한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웃음) 당시 선후배들 사이 ‘홍대 3대 불가사의’ 중 하나가 “황충현이가 어떻게 제때 졸업을 했을까”였어요. 군대 가기 전까지 공부와 담 쌓고 살았거든요. 수업도 매번 빠지고 놀러만 다녔죠. 군 제대 후 학적과에서 “학생, 이대로는 제적이야”란 경고까지 주더라고요. 그제서야 부모님 얼굴이 떠오르며 ‘아차’ 싶더라고요. 부모님이 워낙 엄격하셨거든요. 인생 낭비만 할까봐 재수도 못하게 하셨는데, 노느라 졸업을 제때 못해 등록금을 더 내야 한단 말씀은 죽어도 못 드리겠더라고요. 그때부터 마음을 다잡고 공부했어요. 아마 4학년 2학기에도 저처럼 수업 많이 들은 학생은 홍대 역사에 없을 겁니다. 겨우 학점 맞춰서 졸업했어요. 그럼 취업에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제가 과 대표를 했어요. 80년대만 해도 과 대표를 하면 학교 추천을 받아 웬만한 기업 취직이 가능했죠. 그런데 웬걸, 제 학점으론 그 추천마저 못 받는다는 거예요. 날벼락이었죠. 하는 수 없이 공채 시험을 치는 회사들을 노렸습니다. 대표적인 게 포스코와 삼성이었어요. 마지막 동아줄이라 생각해 문제집을 아예 다 외울 만큼 죽어라 공부했습니다. 결국 두 군데 모두 합격했고 그중 삼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삼성은 3가지 계열로 신입사원을 뽑았어요. 무역·제조, 중공업, 보험·서비스로요. 당시 잘나가는 문과 친구들은 삼성전자·삼성물산이 있는 무역·제조로 많이들 갔습니다. 신세계 백화점, 삼성생명이 있는 보험·서비스는 지금과 달리 인기가 없었죠. 이모저모 따져 보니 중공업이 블루오션이겠더라고요. 1~3지망 모두 중공업을 썼고 다행히 붙었습니다. 중공업 부문은 아무래도 엔지니어들이 더 핵심 인재 대우를 받지 않나요? 아무리 좋은 기술로 물건을 잘 만들면 뭐 합니까. 팔려야 의미가 있죠. 넓은 시야로 시장을 읽을 줄 아는 문과생이 기술자보다 어쩌면 더 핵심 인력으로 대우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사실 기술이란 걸 원체 어렵게 느끼다 보니 엔지니어가 커머스를 익히는 게 더 쉬울 거라 생각하겠죠. 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공학도들처럼 논리적 사고를 즐겨하는 사람들은 넓은 시야로 부드럽게 사고하는 게 어렵습니다. 그게 쉬우면 너무 불공평하죠. (웃음) 그러나 불과 입사 1년 만에 소속 사업부가 해체되고 황충현님은 졸지에 새로운 조직으로 발령이 납니다. 그리고 여기서 바로 운명의 카메라 영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들어가니 예상대로 탄탄대로였나요? 아닙니다. 첫 인사 고과에서부터 D를 받았습니다. 신입 사원한텐 웬만해선 안 주는 점수라고 하니 거의 꼴찌였단 얘기죠. 제가 그만 대형 사고를 쳐 버렸거든요. 어떤 사고였죠? 사연은 이렇습니다. 제 첫 발령지가 철골 판매 부서 수출팀이었어요. 저는 막내다 보니 한 3개월쯤 서류 복사 같은 단순 업무만 했고요. 하루는 해외 입찰 서류를 내고 오라길래 광화문으로 담당 공무원을 찾아갔는데, 막상 다른 직원이 나와 “바닥에 그냥 놓고 가라”는 거예요. 그냥 놓고 가면 될 일이잖아요? 그런데 그땐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서류인데 어떻게 그냥 바닥에 놓고 가나 싶었어요. 그래서 “절대 그리는 못 한다”면서 엄청 따졌습니다. 새파란 신입 주제에 겁도 없이 그 시절 공무원한테 언성을 높이며 대든 거죠. 나중에 회사에 돌아왔더니 난리가 났더라고요. 제 교육을 어떻게 시켰냐고 그쪽에서 혼을 엄청 냈다는 거예요. 더구나 그 입찰도 떨어져 버렸고요. 관청은 같은 입찰을 낸 기업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잖아요. 미운털이 박힌 만큼 저희 입찰 조건이 경쟁사들한테 새어 나갔을 수도 있는 거죠. 무지하게 혼났습니다.  실수를 좀 만회하셨나요? 만회할 기회조차 없었어요. 입사 1년 뒤 소속 사업부가 해체됐거든요. 졸지에 동료들 대부분이 붕뜬 신세가 돼 새 계열사로 발령이 났습니다. 전 삼성정밀이란 곳으로 가게 됐어요. 원랜 방산 사업을 다루는 곳이었는데 수주 텀이 너무 길다 보니 시계·복사기·카메라 등 각종 사업을 추가로 붙였어요. 하지만 결국 카메라만 남게 됐고, 저 역시 카메라 영업 쪽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제 평생의 동반자 카메라와의 만남은 이렇게 좌충우돌로 시작됐어요.

 

Chapter. 2 카메라 영업 10년, 꼴찌가 에이스로 삼성정밀로 발령 난 황충현님은 그곳에서 10년이 넘도록 각종 영업 현장을 뛰어 다닙니다. 그러면서 꼴찌의 대반격도 시작되죠. 달성이 불가능해 보이는 막대한 매출 목표도 척척 맞추면서 조직의 에이스로 거듭나게 된 겁니다. “넓은 시야로 바라보면 제품과 일견 동떨어진 부분에서도 수익을 키울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더라고요.” 현장 영업을 10년 이상 하셨다고요. 도매상은 물론 작은 시장 소매상까지 모두를 대상으로 영업을 했습니다. 원래 영업이란 게 맨땅에 헤딩이니 참 어려워요. 헌데, 80년대만 해도 매출액을 현금으로 수금하다 보니 온갖 부정 사고가 끊이질 않아 더 어려웠어요. 부도·덤핑·밀수 등 살면서 안 좋은 현상과 단어는 이 시절에 다 보고 경험한 것 같아요. 일일이 읊으려면 끝도 없습니다. 이를 딛고 매번 실적을 준수해야 했어요. 연차가 쌓여도 매장 규모와 직위만 달라질 뿐 월 단위로 어떻게든 매출 마감을 지켜야 한다는 건 매한가지였죠.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산전수전공중전이었어요. 가뜩이나 당시엔 삼성의 제품 경쟁력이 낮고 시장엔 해외 밀수품이 많아 어려움이 크셨다고요. 삼성 자사 카메라만 취급하는 직영점 20군데를 2년 동안 총괄한 적이 있어요. 이 직영점들의 매출 실적을 전적으로 제가 책임져야 했죠. 그런데 저희 제품으론 도저히 승부를 볼 수 없겠는 거예요. 라인업도 다양하지 않은 데다 순수 국산이다 보니 성능 면에서 한참 뒤처졌거든요. 업계에선 무슨 배짱으로 자사 제품만 취급하냐고 엄청 비웃기도 했습니다. 헌데, 영업하는 사람들이 뭐 별 수 있나요? 성능 좋은 새 카메라를 뚝딱 만들 수도 없잖아요. 대신 매장에 방문한 손님들 이야기라도 정말 열심히 챙겨 들었습니다. 구매한 사람은 왜 구매했는지, 보기만 하다 나간 사람은 왜 나갔는지 등을 죄다 물었죠. 그랬더니 생각지도 못한 이유들이 나오더라고요. 어떤 이유들이요? “국산 카메라니까 애국심에 샀다”, “직원들의 두발이 단정치 않다”, “손톱이 청결치 못하다”… 온갖 단서들이 쏟아졌죠. 당장 손 쓸 수 없는 것들만 빼고 모두 반영해 봤습니다. 직원들의 인사법부터 두발·손톱도 철저히 관리하며 신경 썼습니다. 이전엔 사소하게 생각한 부분인데 개선되니까 희한하게 매출도 오르더라고요. ‘국산’이란 키워드도 현장에서 정말 잘 먹히더라고요. 이걸 더욱 내세워 신문 광고, 전단지 등에서 ‘국산 구매해 애국하자’는 식의 마케팅을 크게 벌여 봤어요. 역시나 잘 통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손님들 의견을 날마다 경청하고 어떤 방법이 매출 상승에 가장 효과적일지 직원들과 늘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거의 매번 목표를 맞췄어요. 아주 넓은 시야로 바라보면 제품과 일견 동떨어진 부분에서도 수익을 키울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더라고요. 이때부터 사업이란 게 영업, 마케팅, 상품 기획 등 모두가 어우러진 복합적인 영역임을 확실히 알게 됐죠. 그러다 보니 더 크고 구조적인 단서들도 보였습니다. 어떤 단서들이었나요? 구체적인 경험을 들려주세요. 80년대 후반 신용 카드가 막 활성화될 때입니다. 당시엔 카메라가 귀금속으로 분류됐는데, 귀금속은 신용카드로 결제가 안 됐어요. 무작정 BC카드를 찾아가 1년 가까이 매달려 이 제한을 풀어냈습니다. 이후 삼성 카메라를 사는 고객한텐 신용 카드 발급을 혜택으로 주자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신용 카드 발급 요건이 엄청 까다로워 아무한테나 내주지 않았거든요. 신용 카드를 탐내는 고객들의 니즈를 우리가 교묘히 끌어다 쓰고자 한 겁니다. 전략은 정말 잘 통했어요.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헌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신용 카드로 물건을 팔게 되니 매출이 할부 없이 한 번에 팍팍 꽂히는 거예요. 고객이 할부를 하더라도 카드사가 대신 상대해 주니까요. 이렇게 되니 더 이상 대리점을 통해 고객 할부를 관리하게 할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대리점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 거죠. 그래서 대리점 대신 총판을 둬 유통 구조를 단순화하자 제안했고, 그게 받아들여져 전국 100군데가 넘는 대리점이 정리되고 15군데의 총판만 남게 됐습니다. 유통 구조가 단순화되니 중간 마진이 아주 크게 늘었어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리점들이 사라지니까 리스크 비용이 현저히 줄게 됐어요. 대리점은 1억원어치 담보를 넣고 10억원짜리 물건을 갖고 가서 파는 식이잖아요. 잘못해서 부도라도 나면 회사로선 엄청난 손해죠. 헌데 그런 리스크가 사라진 겁니다. 회사에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초년에 망했던 인사 고과는 여기서 다 만회하고 완전히 조직 에이스가 됐습니다. 보너스도 두둑하게 받았고요.

Chapter. 3 삼성 임원 등극! 업계 신화를 쓰다 기나긴 현장 영업을 지나 황충현님은 2000년 CCTV, 비디오 프리젠터 등을 판매하는 광응용사업 부문 영업·기획을 총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상품 기획이란 전혀 새로운 분야의 도전에 맞닥뜨립니다. 현장 영업을 벗어난 건 언제부터인가요?  90년대 중후반 차장 승진 때부터입니다. 그러다 2000년부터 4년간 광응용사업의 영업·기획을 총괄하게 됐고, 거기서 상품 기획이란 분야를 경험하고 배우게 돼요. 영업이 이미 만들어진 제품의 판로를 개척해 내는 일이라면, 상품 기획은 향후 어떤 제품을 만들어야 더 잘 팔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과제였죠. 상품 기획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라 보셨나요? 상품, 특히 제조업 상품은 기술에 관심을 두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나 기술에만 함몰되는 건 대단히 편협한 일입니다. 가령 시장을 뚫어 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능은 3가지뿐인데, 기술 중심으로만 생각하면 10가지를 개발하게 돼요. 그럼 쓸데없이 비용만 커지고 정작 할 일은 제대로 못합니다. 당시 삼성에선 비디오 프리젠터란 상품이 그랬어요. 성능이 좋은 스웨덴·일본 제품을 무분별하게 따라잡으려다 보니 온갖 기능을 개발해 덕지덕지 붙여 놨더라고요. 고객들은 원치도 않는데 괜히 가격만 올려놔 버린 거죠. 저희 주 고객은 국내 학교들이었어요. 학급에 필요한 기능들만 남기고, 대신 디자인을 강화해 새 상품들을 내놨습니다. 결과는 아주 좋았습니다. 고객 만족도는 더 높였는데 원가는 낮아져 마진율이 크게 올랐죠. 결국 기술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시장의 어떤 타깃을 노리느냐, 그 타깃의 정확한 니즈가 무엇이냐입니다. 2005년 황충현님은 드디어 임원인 상무로 승진, 카메라 등 이미징 사업 부문 마케팅과 상품 기획을 책임지게 됩니다. 그리고 4년 후인 2009년 일명 ‘한효주 카메라’로 통한 ‘듀얼 뷰 카메라’를 출시합니다. 당시 디지털 카메라로선 생소했던 셀카 촬영 기능으로 화제가 돼, 불과 출시 3개월 만에 무려 100만대를 팔아 치우는 대히트를 기록합니다. ‘한효주 카메라’, 어떻게 기획된 상품인가요? 당시 이건희 회장의 말씀에 따라 ‘일류화’가 삼성의 가장 큰 어젠다였어요. 삼성 카메라도 어떻게든 일류로 올라서게 만들어야 했죠. 그런데 캐논·소니·니콘 등 일본 업체들에 비해 저흰 너무 뒤처져 있었어요. 핵심 소재 기술력이 무려 10년 정도 격차가 났죠.

제조업 상품이 기술력을 배제하고 일류가 될 수 있나요? 기존 링 위에서라면 도저히 승산이 없죠. 하지만 우리한테 유리한 새 링을 만들고 거기에 경쟁자들을 불러들여 싸운다면 또 모르는 일이죠. 그 의도로 주력한 아이디어 중 하나가 바로 ‘컴팩트 카메라’로 불린 작은 디지털 카메라였어요. 거기서 ‘듀얼 뷰 카메라’도 탄생한 거고요. 우선 산업의 거시적 흐름과 소비자들의 목소리에 집중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은 휴대폰 카메라의 화소수가 가파르게 높아지던 시기였어요. 전통 카메라 시장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 중이었죠. 휴대폰 카메라는 날로 좋아지는데 전통 카메라는 왜 셀카조차 안 되냐는 불만들이 많았어요. 이 니즈를 공략할 수 없을까 고민했고 충분히 가능하단 결론이 나왔습니다. 오히려 일본보다 우리가 더 잘 풀 문제였죠. 왜 그렇게 보셨나요? 촬영창을 앞에도 배치해 셀카가 가능한 ‘듀얼 뷰’를 구현하는 건, 일본이 앞선 아날로그적 기술이 아니라 한국이 앞선 디지털 기술이 더욱 필요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뿐입니까? 디지털 기술 중 한국이 월등한 분야가 바로 통신이잖아요. 블루투스를 탑재해 카메라 사진을 휴대폰으로 전송할 수 있게끔도 했어요. 삼성이 최초였죠. 영상 촬영이 가능한 디카를 만든 것도 저희였어요. 일본 경쟁 업체들이 정말 깜짝 놀라더라고요. 전략이 적중하셨습니다. ‘한효주 카메라’는 출시 3개월 만에 무려 100만대가 팔렸어요. 언제 100만대를 넘겼나 지금은 기억도 잘 안 나요. 일일이 세어본 게 아니니까 정확히 얼마 팔렸는지도 모르고요. (웃음) 하지만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기자들을 모아 놓고 제품 발표회를 열었는데, 그날부터 반응이 폭발적이었던 건 생생히 기억납니다.

Chapter. 4 CEO가 된 카메라 산업 대부, 그에게 닥친 최대 시련? 삼성에서의 31년을 뒤로하고 황충현님은 2013년 카메라 렌즈 전문 기업 삼양옵틱스에 신임 대표로 합류합니다. 당시 삼양옵틱스는 수백억원대 적자를 기록하며 관리 종목으로 지정되는 등 심각한 경영난에 처해 있었습니다. “첫 출근하고 이틀간은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어요.” 삼양옵틱스 합류는 어떤 계기였나요? 2013년 사모펀드인 보고펀드(현 VIG파트너스)가 옛 삼양옵틱스의 카메라 렌즈 사업부만 분할 인수한 업체가 바로 지금의 삼양옵틱스예요. 당시 사모펀드와 내부 경영진이 찾던 새 CEO의 조건이 3가지였답니다. 첫째,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인 교환 렌즈를 다뤄 본 삼성 출신이 왔으면 좋겠다. 둘째, 상품 기획을 제대로 한 경험이 있었으면 좋겠다. 셋째, 영업 베이스가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이걸 종합해 보니 딱 제 경력의 역순이더라고요. 때문에 저를 적임자라 생각하고 영입했다 하더라고요. 신임 대표로서 이 회사가 해결해야 할 핵심 문제가 무엇이라 보셨나요? 당시엔 카메라용 교환 렌즈와 CCTV용 렌즈를 모두 제조하고 있었어요. 매출은 전자한테 60%, 후자한테 40%가 나고 있었죠. 사업을 쭉 검토해 보고 내린 결론은 이랬습니다. ‘미래에 굶어 죽기 딱 좋을 회사다.’ 무슨 이유에서였죠? 교환 렌즈는 초점을 맞추는 방식에 따라 자동과 수동으로 나뉘는데, 시장 규모는 압도적으로 자동이 커요. 수동은 전체 5%밖에 되지 않죠. 일본은 아예 건들지도 않아요. 그런데 이 회사는 수동만 생산하고 있더라고요. 물론 점유율이 70%로 거진 독점 수준이긴 했어요. 가격을 거의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이점은 있었죠. 하지만 안주할 상황은 아니었어요. 저가 공세로 밀어붙이는 중국 경쟁사들이 맹추격해 기술적으로도 곧 따라잡힐 수 있겠더라고요. CCTV용 렌즈도 비슷한 처지였습니다. 당시 주 거래처였던 삼성 측 담당자를 만나 알아보니 이미 다른 거래처를 찾는 중이더라고요. CCTV가 발전하는 만큼 렌즈도 발전해야 하는데 삼양옵틱스는 현 수준에 안주하고 있으니 버려질 위기였던 겁니다. 그때 그 담당자가 “삼양옵틱스 대표나 고위 임원은 오늘 처음 만나 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위기가 오는지도 몰랐던 거예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데 사모펀드와 뜻을 모았습니다. 수동 쪽은 현상 유지만 하고 CCTV용 렌즈 사업은 아예 중단하기로 했어요. 확보된 여력으로 자동 쪽 시장에 진출하기로 했죠. 기존 직원들의 반발이 있었을 듯합니다. 첫 출근하고 이틀간은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어요. 비서는 여름 휴가 중이라 일주일 넘게 얼굴도 못 봤습니다. 공장 시찰을 가도 보고하러 오는 사람도 없더라고요. 당시 삼양옵틱스는 법정 관리 체제가 끝나고 10여년간 대표가 4~5번이나 교체된 상황이었어요. 한 대표가 채 2년을 못 버텼던 거죠. 그러니 저도 이들에겐 ‘one of them’이었던 거예요. 그러면서 본인들끼린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아예 “형” “누나” “이모” 이렇게 부르고 있더라고요. 이게 회사인지, 학교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업무 보고를 받아 보니 일종의 패배주의적 관성도 느껴졌어요. 잘하던 것에서 벗어나면 망하는 줄 알던 거죠. 새로 할 일은 많은데 관성은 강하고 조직 콘트롤은 너무 어려워 보이고… 뿐만 아닙니다. 설상가상 연이어 큰 사고와 시련까지 덮쳤어요. 무슨 일이었나요? 2015년 한 해에 두 차례나 화재 사고가 났어요. 첫 화재는 3월이었어요. 해외 출장으로 영국 런던에 막 도착한 날이었죠. 시차 때문에 새벽에 뒤척이는데 한국에서 전화가 왔어요. “렌즈 공장에 불이 났다.” 짐도 제대로 풀기 전에 한국에 바로 다시 들어왔습니다. 와서 보니 많이 타버린 건 아니더라고요. 천만다행이다 싶었는데 결국 새로 건물을 지었습니다. 천장에 그을린 화재 연기가 시간이 지나면서 까만 알갱이가 돼 떨어지더라고요. 이 알갱이들이 공정 중인 렌즈에 들러붙는데 통 떨어지질 않는 거예요. 도저히 감당이 안 돼 어쩔 수 없이 신축을 결정했죠. 헌데, 하늘도 무심하게 8월에 다른 생산 시설에서 또 한 번 불이 났습니다. 두 번째 사고 일주일 뒤 건강 검진을 받았는데 확인해 보니 위암이더라고요. 다행히 초기에 발견돼 절반쯤 떼어 내고 잘 버텨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여하간 원래 그해에 상장도 추진하려 했는데 결국 포기했습니다. 그때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일련의 위기들,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말 그대로 전화위복이죠. 함께 시련을 겪고 이겨 낸 덕에 직원들하고 일종의 패밀리십이 형성된 거예요. 특히 새 건물을 지으면서 다들 정말 고생이 많았습니다. 직원들 하나하나가 굉장히 헌신적으로 일해 줬어요. 서로 끈끈했던 만큼 회사를 향한 애정들도 다 컸던 거죠. 그때 저도 참 감명을 많이 받았고요. 때문에 그때부터 직원들을 위한 복리후생이나 성과급 체계에도 더 신경을 쓰게 됐습니다. 삼성의 관련 제도들을 제가 잘 아니까 그걸 참고해 시스템을 많이 고쳤죠. 그때쯤 되니 직원들 입에서 “금방 갈 사람은 아니네” 소리가 나온 것 같습니다. 일종의 믿음이 생긴 거죠. 물론 제가 오고 나서 실적이 계속 올라가는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지만요.

Chapter. 5 수백억 적자 → 연매출 663억… 4년 만에 일군 대반전 2017년 삼양옵틱스는 663억의 연매출과 200억원의 영업 이익을 벌어들이며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같은 해 코스닥 상장에도 성공하죠. 합류 4년 만에 대반전을 만들어 냈습니다. 신사업 시장 진출을 잘 밀어붙이고 성공시킨 게 주효했어요. 특히, 한달에 한 번씩 온라인 판매 사이트나 매거진에 나온 우리 제품 평가를 쫙 모아 리뷰를 했습니다. 고객들이 우리 제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다 나와 있잖아요. 데이터와 고객 목소리만 우직하게 들이미니까 직원들도 점차 관성을 깨고 변화의 필요성에 수긍하게 됐습니다. 신사업은 지극히 후발주자였죠.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요? 관련 기술을 약간이라도 익힌 사람이 회사에 아예 없었어요. 때문에 과거 삼성에서 인연을 맺은 분들이나, 일본 퇴역 기술자들을 아파트까지 내주면서 기술 고문격으로 모셔 왔습니다. 직원들한테 일종의 선생님을 붙여준 거예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기술 면에서 일본 업체들을 따라잡을 순 없었죠. 그들과 비슷한 가격으로 같은 시장 포지션에서 싸웠으면 필패란 얘기입니다. 그럼 어떻게 전쟁을 치러야 하는지도 분명해지죠. 우리가 공략 가능한 가격대는 정해져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겨냥하는 원가에 맞춰 제품을 생산하는 겁니다. 전략도 명확해요. 타깃한테 꼭 필요한 기능들만 남겨 비용을 낮추는 거죠. 가격만 낮춘다고 단번에 성장시키기란 어려웠을 텐데요. 맞아요. 또 하나의 시장 공략 포인트가 바로 ‘빠른 유통’이었습니다. 보통 고객이라 하면 소비자만을 떠올려요. 하지만 중간 유통 업체들도 엄연한 고객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신제품을 잘 내놓는 브랜드를 선호해요. 신제품일수록 더 잘 팔리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일본 업체들은 신제품 개발 주기를 대략 2년으로 잡고 연간 신제품을 5개 정도 내놨는데, 우린 이 주기를 10개월 안쪽으로 당기고 파생 상품까지 더해 신제품을 연간 10개쯤 내놨습니다. 당시 일본 경쟁사 사장과 자주 얘기를 나눴는데 “당신이 부럽다. 우린 죽어도 사이클 단축은 못 한다”고 하소연하더라고요. 신제품을 어떻게 그렇게 뚝딱 많이 만들었나요? 비결은 하나죠. 고객의 목소리를 죽어라 듣는 겁니다. 그럼 손쉬운 기술로도 풀어줄 수 있는 여러 니즈를 발견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촬영할 때 신호를 주기 위해 불을 깜빡거리게 하는 것도 정말 간단한 기술로 해결된 건데 고객들이 무척 좋아했죠. 별다른 시행착오는 없으셨나요? 왜 없었겠습니까. (웃음) 처음으로 출시한 2개 기종의 자동 초점 렌즈는 대실패였어요. 초점을 맞출 때마다 소음이 났기 때문이죠. 귀에도 거슬릴 뿐 아니라 동영상을 찍을 때도 녹음이 돼 문제였어요. 예상을 아예 못 했던 문제는 아닌데 일종의 타협을 해 버린 대가였죠. 그렇게 타협한 상품은 다 시장의 외면을 받더라고요. 하지만 시행착오도 빨리, 많이 겪는 게 좋아요. 적어도 다음 시도에선 그만큼의 실수들을 죄다 안 할 거 아니에요. 이후 수없이 제품 테스트를 하면서 어떤 부분에서 소리가 나는지 찾게 했어요. 특정 기술이 필요하면 어떤 스펙의 선생님이 필요한지 묻고 어떻게든 모셔 왔죠. 그 결과 소음 문제는 크게 개선됐고 현재까지도 우리만의 시장 포지션에서 잘 살아남고 있습니다.

Chapter. 6 불운을 기회로 되살린 베테랑의 40년 2023년 황충현님은 취임 10년 만에 삼양옵틱스 대표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프로란 불운을 기회로 바꿔 낼 수 있는 사람” 올해 경영에서 물러나셨습니다.  벌써 10년이 지났더라고요.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작년에 먼저 물러나겠다고 했는데 후임자를 찾을 때까지 1년만 더 있어 달라 하더라고요. 약속대로 1년이 지난 올해 봄 재차 용퇴 의사를 밝혔어요. 결국 후임을 못 찾았는데 고맙게도 대주주가 직접 대표를 맡겠다고 하더라고요. 향후 계획은 어떠신가요? 관둔 지 며칠 됐다고 벌써 계획이 있겠어요. 쉬면서 책을 좀 많이 보려 하고 있어요. 각종 인문·마케팅 서적을 많이 사 놨는데 완독한 책은 그리 많지 않네요. 그래서 뭔가 찜찜하죠. (웃음) 운동도 하면서 체력 관리에도 더 신경 쓸 참입니다. 다만, 그저 조금 관심이 가는 분야는 있어요. 우리나라의 고질병인 중소기업의 인재 공백 문제요. 전 능력 있는 시니어 활용이 이 문제 해결의 키가 아닐까 해요. 삼양옵틱스도 저 같은 시니어 채용을 통해 나름의 문제를 해결한 거잖아요. 사실 직장에 다니고 있을 때부터의 오랜 문제 의식이기도 합니다. 이번 인터뷰도 여러 기업에 비슷한 영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수락한 측면도 있어요. 카메라와 함께한 세월만 40년입니다. 이 사업의 본질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사진 예술의 만족과 발전’입니다. 쉽게 말해 ‘사진 찍는 사람이 의도한 대로 사진이 잘 찍히게 한다’는 거예요. 카메라 회사가 진짜 잘나가면 그 방면 전문가나 리더들이 한마디씩 해요. 진짜 유명한 사진가들의 작품엔 카메라가 어떤 기종이고 렌즈는 어떤 제품인지 등의 정보가 한 줄씩 올라갑니다. 바로 이 관점에서 카메라 사업을 성찰해 봐야 해요. 사업이라고 해서 단순히 비용 낮춰서 많이 팔자는 문제로만 생각해선 안 됩니다. 그리고 해답은 결국 특출난 기술이 아닌 시장과 소비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제품이 안 그렇겠냐마는 특히 제조업은 그 제품을 쓰고 다루는 사람에게 언제나 답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후배 직장인이나 사업가들에게 해 주실 말씀이 있다면요? 아무래도 삼성에서 오래 일하고 배우면서 그쪽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거기서 많이 쓰는 말 중 ‘업의 개념’이란 말이 있어요. 뭐가 됐든 핵심과 본질을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는 뜻이죠. 바로 위 질문에서 제가 답했던 말과도 연관되는 얘기예요. 과거 이건희 회장이 신라호텔의 업의 개념을 얘기했던 일화는 유명하죠. 흔히들 서비스업으로만 생각하지만 부동산업, 설비·장치업도 해당된다는 얘기였습니다. 모두가 바쁘다 보니 그저 닥치는 대로 일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그럴수록 ‘이걸 왜 하는 거지?’ ‘왜 이런 방식으로 하고 있지?’를 자문하며 일하면 좋겠습니다. 그 답의 유무에 따라 10년 뒤 결과물은 천양지차로 다를 테니까요. 부디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황충현님이 생각하시는 ‘프로’란 무엇인가요? 여태껏 지나온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영업 현장에서 오래도록 고초도 겪고, 목표에 짓눌려 스트레스도 많았고… 참 쉽지 않았습니다. 성취한 만큼 어찌 보면 불운도 숱하게 많았던 듯해요. 하지만 인생은 아이러니입니다. 그 모든 불운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있었을까요? 조직이 해체돼 새 계열사로 발령 나지 않았다면 영업이란 걸 해 보지도 카메라와 만나지도 못 했을 수 있어요. 삼양옵틱스 때도 마찬가지예요. 두 번의 화재는 뼈아팠지만 결국 그 덕에 조직이 뭉쳐 더 큰 성장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결국 진정한 프로란 불운을 기회로 바꿔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기회는 절실한 사람만이 붙잡는다고 하잖아요. 불운에 주저앉으면 좌절이지만 견디면 간절함을 얻습니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나 기복이 있어요. 마냥 오르기만 하면 좋겠지만 내려갈 때도 있죠. 그때마다 조금씩 더 간절해질 수 있다면, 그 모든 순간이 어쩌면 성공에 다다를 필연의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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